아직도 수많은 처음들이 우리에게 와서 부딪힌다. 피했으면 좋았을 일도, 언젠가는 맞서야 했을 일들도 있다. 어쨌든 잘 겪어내야 처음이 된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으니까. 시작이자 끝이 되지 않도록, 다가오는 출발들을 최선를 다해 마주하고 있다. 숙련된 내일을 만나고 싶어서 수많은 처음들을 넘는다. 40
67 내가 스튜디오와 중고 잡화점을 병행하게 된 건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실 매일매일 열렬히 꿈꾸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래전의 경험들이 언제나 내 주변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내 안에 작은 종자를 심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의 모든 체험들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작은 근원을 싹트고 성장하게 했다. 정말 무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었고 인식을 바꿀 수 있은 계기들을 예기치 못했던 길목에서 만났다. 그렇게 의지와 상상을 메마르게 두지 않으면 그 씨앗은 어느새 성큼 현실이 되어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71 이렇게 긴 세월을 간직한 물건들에는 어딜 봐도 낡았지만 단단하게 제 형태와 빛깔을 지켜온 장함이 있다. 애초에 정교하게 만들어쟈애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저 먼 옛날과 지금의 미감이 이어진다고 느껴질 때 생겨나는 작은 짜릿함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연동되는 아름다움.
99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점잔을 떨지 않고 혹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격렬히 싸우고나면 어쨌든 무언가는 나온다는 것. 그 결과물은 서로의 의갼을 반죽하고 둥글게 굴려 만든 부드러운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을 이어 붙인 완전히 새롭고 거친 모습이기도 하다. 대부분 그렇게 격투 끝에 나온, 한곳에 치우치지 않은 안이 정확했다. 상대방이 아니라면 절대 다다를 수 없는 판단이었다.
109 입에 붙지 않던 이름이 익숙해지고 다시 공이나 헝겊인형이 여기저기 굴러 다니는 작업실이 되었다. 복원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세계가 다르고, 그 안에서 한강이와 택수의 세계가 다르다. 사랑하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의 문이 하나씩 열리는 것처럼.
270 힘 빼고 즐기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고통스러워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도 거물도 무엇도 아닌 나는 결국 후자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불안과 공포를 모래주머니처럼 다리에 묻고 무게를 이겨가며 터벅터벅 걸어나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꺾이는 무릎으로라도 한발 한발 용기를 내서 나아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정멜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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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이순신 선생님의 메일 ㅠㅠ
내가 스튜디오와 중고 잡화점을 병행하게 된 건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실 매일매일 열렬히 꿈꾸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래전의 경험들이 언제나 내 주변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내 안에 작은 종자를 심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의 모든 체험들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작은 근원을 싹트고 성장하게 했다. 정말 무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었고 인식을 바꿀 수 있은 계기들을 예기치 못했던 길목에서 만났다. 그렇게 의지와 상상을 메마르게 두지 않으면 그 씨앗은 어느새 성큼 현실이 되어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긴 세월을 간직한 물건들에는 어딜 봐도 낡았지만 단단하게 제 형태와 빛깔을 지켜온 장함이 있다. 애초에 정교하게 만들어쟈애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저 먼 옛날과 지금의 미감이 이어진다고 느껴질 때 생겨나는 작은 짜릿함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연동되는 아름다움.
찾아오는 이들 모두에게 맞출 수 없다면 운영하는 이에게 최적화되어 그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공간이면 좋지 않을까.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점잔을 떨지 않고 혹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격렬히 싸우고나면 어쨌든 무언가는 나온다는 것. 그 결과물은 서로의 의갼을 반죽하고 둥글게 굴려 만든 부드러운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을 이어 붙인 완전히 새롭고 거친 모습이기도 하다. 대부분 그렇게 격투 끝에 나온, 한곳에 치우치지 않은 안이 정확했다. 상대방이 아니라면 절대 다다를 수 없는 판단이었다.
불운은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포개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입에 붙지 않던 이름이 익숙해지고 다시 공이나 헝겊인형이 여기저기 굴러 다니는 작업실이 되었다. 복원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세계가 다르고, 그 안에서 한강이와 택수의 세계가 다르다. 사랑하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의 문이 하나씩 열리는 것처럼.
언어는 때로 수많은 것을 누락시킬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다.
작고 동그란 봉우리 하나하나에도 이름이 붙어 있는 제주도에 가면 아끼고 귀중한 마음은 결국 이름을 지어주는 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함께 일해보고 싶은 업체에 먼저 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자취를 단단히 만들어 두는 대에 공을 드리는 것도 괜찮다. 잘 모아두고 분류해두면 누구든 알아 보게 되어 있다.